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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은사 배향 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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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은사 배향 선조

클릭하시면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文忠公 (문충공)

龍崗公 (용강공)

文靖公 (문정공)

三溪公 (삼계공)

南溪公 (남계공)

慕軒公 (모헌공)

龜溪公 (구계공)

八松公 (팔송공)

 

 

 

8) 八松公 (팔송공)

 

世代

휘 (諱)

號 (호)

生

卒

관 직

14세

필달(必達)

팔송(八松)

1611년

693년

∙전적, 형조정랑,

∙예조정랑 봉상시첨정,

∙단양군수

 

거창군 가조면 소재지에서 서북 방향으로 난 도로를 따라 장기리, 창촌을 지나 계속 가다가 병산(屛山)마을 앞의 다리를 건너면 가북면(加北面) 용산리(龍山里)이다. 용산이란 마을 이름은 마을 뒤의 가야산(伽倻山) 줄기인 정봉(正峰)이 용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 용산은 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넓고 기름진 들이 펼쳐지고 북천(北川)과 동천(東川)이 합류하여 예로부터 경관이 좋은 곳으로 이름이 난 마을이다. 이 마을엔 인재도 끊이지 않았으니 모계 문위25) 와 팔송 정필달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팔송의 증조 방(房)이 창녕 조씨 언명(彦明)의 따님에게 장가 들었는데, 처가에 대를 이를 자손이 없자 외손봉사를 위해 거창에 비로소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진양 정씨들이 용산마을의 대성이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팔송 정필달이라고 할 수 있다.

 

팔송은 1611년 4월 13일 아버지 준26)(浚)과 어머니 함양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자질이 총명하여 7세 때부터 시를 지을 줄 알았다. 8세 때 합천 야로에서 문경진(文景震)에게서 소학을 배웠으며, 13세 때는 부친을 따라 진주로 와서 능허 박민에게 공부를 배웠다. 능허는 남명의 제자 수우당 최영경에게 글을 배운 진주 선비로 항상 남명에게 글을 직접 배우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기고 있었다.팔송이 능허에게 글을 배운 것은 남명의 가르침을 전수받았다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16세 때는 오계(梧溪) 조정립(曺挺立)선생 문하에서 글을 배웠는데, 오계는 합천 출신으로 남명 선생을 사숙한 선비로 남명의 제자 도촌 조응인의 아들이다. 도촌은 한강 정구의 천거로 선조 때 왕자사부로 임명된 학식이 높은 선비였다.

 

거창에 살면서 인근 이름난 선비들을 찾아 학문을 익힌 팔송은 안음별시(安陰別試) 상주감시(尙州監試) 금산 동당시(金山 東堂試) 고령별시(高靈別試) 등에서 차례로 급제를 했다. 약관의 나이도 되기 전에 각종 과거에 급제를 하자 팔송의 명성이 고을에 자자했으며 서울에까지 들릴 정도였다.

팔송은 특히 시를 잘 지었다. 20세 때 가야산에 올라 ‘左手掃天雲 右手奉天月’ 라는 시구를 지었는데, 「왼손으로 구름을 깨끗이 하고 오른손으로는 달을 받드네.」라는 뜻으로 자신의 포부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 때 거창 선비 박유가 지조를 지키기 위해 왕건의 출사 부탁을 거절하고 산으로 들어갔는데, 이 산을 후세사람들은 ‘박유산’이라고 한다. 팔송이 박유의 지조를 기리는 시를 지었는데, 이 시는 지금껏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高士與高山

高高高孰譬

山名以士傳

山未高於士

학덕이 높은 선비가 높은 산과 더불어 있으니

높은 것 위에 더 높은 것을 무엇으로 비유하리.

산의 이름이 선비의 이름으로 전해지니

산이 선비보다 높지 않네

 

29세 때 팔송은 동계 정온27)을 찾아가 제자의 예를 갖추고 학문을 익힌다. 이때 동계는 조정에서 벼슬하다가 부모상을 당해 용산으로 내려와 여막을 지키고 있었다. 동계는 팔송의 뛰어난 자질을 보고, 기뻐하며 제자로 받아들였다. 이어 당시 거창에 내려온 용주 조경28)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다. 용주 조경은 남명선생의 신도비를 지은 선비이다. 모계 문위선생 문하에서 학문을 전수 받았다.

 

34세에는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했다. 사재감참봉, 봉상시 직장 등의 벼슬을 거쳐, 전적겸 사학교수, 사헌부 감찰을 지내다 예조좌랑으로 있을 때 부친상을 당해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한다. 이후 더 이상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팔송정(八松亭)을 창건하여 제자들을 모으고 학문에 정진하고자 했다. 이때부터 세상 사람들이 그를 ‘팔송선생’이라고 불렀다. 고향에서 학문에 정진하고 있던 팔송을 조정에서 다시 불렀다. 팔송은 왕명을 어길 수 없어 다시 출사의 길로 나선다. 전적, 형조정랑, 예조정랑 봉상시첨정, 단양군수 등의 벼슬을 지내고 물러나 양양에 있는 금곡이라는 곳이 산수가 수려해 말년을 보내기 적합하다고 생각해 집을 짓고 기거를 했다.

 

숙종조에 다시 직강, 봉상시부정, 사예 등의 벼슬로 불렀으나, 병을 칭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당시 조정이 당파싸움으로 시끄러웠다. 팔송은 벼슬에 나가기 보다는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폐단을 고칠 것을 주장했다. (조선왕조실록 / 숙종 22권, 16년(1690 경오 / 청 강희(康熙) 29년) 3월 17일(무신) 1번째 기사 과거의 부정에 대한 전 사예 정필달의 상소 참조) 당시 과거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올린, 이 글을 보고 임금이 팔송의 직언을 칭찬하면서 호피를 내렸다. 또 팔송은 숙종에게 정치를 서두르면 안 된다는 뜻을 상소로 올리기도 했다.

 

팔송의 평소생활은 아침 일찍 일어나 몸단장을 하고 바르게 앉아 항상 반성하는 자세로 일과를 보냈다. 제자들에게는 “먼저 큰 뜻을 세우고 공부를 하라”라는 뜻을 전하기도 했다. 팔송은 고향에서 학문에 정진하다가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면우 곽종석, 교우 윤주하 등 거창의 선비들은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해 문집을 만드는 일에 앞장서기도 했다.

 

bg_09.png 기록 및 유적

구 분

제 목

찬 (撰)

소 재 지

비 고

記

八松公 必達 行錄

김천일

 

 

八松公 必達 行狀

윤주하

 

 

八松先生常享文

 

 

 

八松先生常享文

면우 곽종석

 

 

碑

八松先生 必達 墓碣銘

도사 이종기

 

 

八松先生鄭先生 崇慕碑

벽사 이우성

거창군 가북면 용산리

 

著 書

팔송선생 文集29)

八松 鄭必達

정교당

 

논문

팔송 정필달의 생애와 詩世界

최정은

경상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필달(必達)

 

진경(晉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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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덕(任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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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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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익(天益

 

 

 

 

 

 

 

 

 

 

bg_08.png

길봉(吉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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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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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 (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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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선(止善)

 

 

길보(吉輔)

 

 

 

황 (潢)

 

지수(止守)

 

 

능록(能祿)

 

 

 

택 (澤)

 

지기(止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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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益漸(女)

 

 

 

 

 

 

 

 

 

 

 

 

 

 

 

 

bg_08.png

이신(以信

 

석좌(碩佐)

 

 

 

 

 

 

 

bg_08.png

석우(碩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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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角)

 

 

 

 

 

 

석찬(碩贊)

 

항 (亢)

 

 

 

 

 

 

 

 

방 (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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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大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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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璧)

 

 

 

 

 

 

 

 

삼 (參)

 

 

 

 

 

 

 

 

 

 

 

 

bg_08.png

준 (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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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달(必達)

bg_08.png

문오(文五)

 

 

 

 

 

 

필영(必榮)

 

수오(粹五)

 

 

 

 

 

 

許涏(女)

 

채오(采五)

 

 

 

 

 

 

閔遜(女)

 

희오(熙五)

 

 

 

 

 

 

李明義(女)

 

李元衡(女)

 

 

 

 

 

 

 

 

李萬容(女)

 

 

 

 

 

 

25) 문위(文緯) 1555(명종 10)∼1632(인조 10).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순부(純夫), 호는 모계(茅溪). 통정대부(通政大夫) 산두(山斗)의 아들이다. 거창(居昌) 출신으로 남명 조식(曺植)· 덕계 오건(吳健)· 한강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창에서 의병들을 모집하고, 의병장 김면(金沔)과 함께 고령(高靈)에서 왜군을 맞아 싸웠다. 김면이 싸움 중에 병으로 죽자 뒷일을 맡아 처리하였다. 또한, 부모의 상을 당하자 고향인 거창현 모계리(茅溪里)에 터전을 마련하고, 10여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와 같은 독행(篤行)으로 부제학(副提學) 김우옹(金宇顒),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에게 천거되어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다. 그 뒤 선공감주부(繕工監主簿)·사헌부감찰을 지냈다.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정인홍(鄭仁弘)과는 같은 남명의 문인으로 구면이었으나, 그가 대북(大北)의 집권자가 되자, 관계를 끊고 두문불출 독서에 전념하였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 후 70세의 나이로 고령현감에 부임하였으나, 수개월 뒤 병으로 사임하였다. 거창의 용원서원(龍元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모계집》이 있다.

26) (1601~1654), 자 - 洞甫, 호 - 石澗

27) (鄭蘊, 宣祖 2년;1569-仁祖 20년;1642)의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 본관은 초계(草溪)이며, 진사(進士) 유명(惟明)의 아들이다. 광해군(光海君) 6년(1614) 8월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이 인륜에 어긋났음을 상소하고, 그 가해자인 강화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을 참수하라고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서 10년간 대정현(大靜縣)에 유배되었다.

28) 조 경(趙 絅 , 1586~1669)) 본관 한양(漢陽), 자 일장(日章), 호 용주(龍洲), 시호 문간(文簡)

29)八松 鄭必達(1611-1693)의 詩文集. 원래 八松의 遺文은 많이 있었으나 200여년 내려오는 동안에 거의 없어지고 衰集 당시에는 겨우 舊本 4卷만이 남아 있었음. 그 외에 旁孫인 光斗가 謄寫한 것을 합하여 13편이 되었는데 이것을 俛宇 郭鍾錫의 校正을 거쳐 1902년에 9세손 載星에 의하여 晋州의 龍山齋에서 木活字로 活印 되었음 / 경상대학 고문헌시스템(nmh.gsnu.ac.kr)에서 원문 및 텍스트 열람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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