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은사 배향 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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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文忠公 (문충공)
世代 |
휘 (諱) |
號 (호) |
生1) |
卒 |
관 직 |
4세 |
천익(天益) 初諱 - 天翼 |
퇴헌(退軒) 문충(文忠):시호 |
미상 |
미상 |
∙전객령(典客令) ∙판부사(判府事) ∙진양군(晉陽君) |
공은 숭은사 주벽으로 영정과 위패를 함께 모시고 있다. 선생은 어릴 적부터 학문이 정일하고 문장이 전아하여 당세 유학의 영수가 되었다. 문충공 퇴헌 천익 선조님은 中祖(晉卿)로부터 4세로 고려 31대 공민왕조에 전객령, 판부사(종2품)를 지내시고 치사(致仕2))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작은 집을 짓고 퇴헌이라 자호 했다.
사위 문익점3) (충선공)이 원나라에 사신(서장관)으로 갔다가 목면종자를 가지고 왔으나4) 지리적 요인, 기후 등이 맞지 않아 어려운 생육환경에서도 오로지 1개를 싹틔워 번식 시키고 씨아와 물레를 창안하였다. 공의 노력으로 전국에 보급된 목면업은 농가 경제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 하였고, 의생활을 비롯해서 생활문화의 질을 크게 향상시켰다. 공의 성공은 훗날 유럽의 산업혁명5) 과 버금가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비유된다.
송죽시에 「세상일 어지러워 돌아보면 무얼하리 대와 솔 푸른 그늘 뜨락에 가득한데 바람에 그윽한 뜻을 맡겨두고 사느니6) 」 퇴헌 천익 선조 읊으니 「산 이내 물에 어려 갈매기 하얀 날개 숨어서 사는 이 몸 뉘 있어 알아 주리 골짜기 깊숙한 숲속 드높은 뜻 기르네.7) 삼우당 문익점 선생 화답한 기록이 있음을 볼 때 옹서간의 존경과 사랑이 있는 아름다운 관계를 보는 듯하다.
추후 조선 태종 때 공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晉陽君 文忠公으로 追奉(추봉)되었으며, 현종, 숙종조에 공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각처 유림들이 通文(통문), 發文(발문) 등으로 별도 賜額書院(사액서원)을 탄원하고, 순조 2년(1802년)에 도천서원에 합향까지도 청원 했으나, 師弟翁婿(사제옹서)간 서열 문제로 이루지 못하자 1833년 진주 마동에 영호남 유림들의 뜻을 모아 「청계서원」을 지어 봉향하였다.
종중 기록 및 유적
구 분 |
제 목 |
찬 (撰) |
소 재 지 |
비고 |
기념관 |
면화시배유지 기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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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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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 |
문충공 퇴헌선생 행록 |
생원 권사수 |
진양정씨은열공파문헌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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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충공퇴헌선생 가장 |
후손 정상규 |
상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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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안문과 춘추상향문 |
참판 한진의 |
상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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典客令致仕 退軒 鄭天益先生 高麗大殿 奉安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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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고려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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碑 |
문충공 퇴헌선생 신도비 |
문소 김황 |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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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충공 퇴헌 정천익선생 면화사적비 |
노산 이은상 |
진주시 상봉동 106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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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동) 청계서원 묘정비 |
孫堂 이상희 |
문헌록 / 비문만 전해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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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헌 정천익선생 사적비 |
牛峰 이병도 |
청계서원 (p52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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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 |
고려전객령치사 정천익선생 영정 |
창천 조원섭 |
숭은사, 면화시유배지(단성), 고려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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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헌기록 목록
서 명 |
권 차 |
기 사 명 |
저/편/필자 |
고려사 |
高麗史111卷 列傳24 |
文益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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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
太祖 14卷, |
7年(1398 戊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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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東史綱目) |
동사강목 제17상 |
기사년 후폐왕창(後廢王昌) 원년 |
이익(李瀷) |
성호사설(星湖僿說) |
성호사설제4권 |
잠면구(蠶綿具) |
안정복(安鼎福) |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 |
신증동국여지 승람 제31권 |
慶尙道 / 단성현(丹城縣) |
이행(李荇 등) |
벽오유고(碧梧遺稿) |
碧梧先生遺稿 卷之七 |
謾記 |
이시발(李時發) |
성호전집(星湖全集) |
海東樂府 |
木綿歌 |
이익(李瀷) |
자저(自著) |
自著 卷之一 |
廣韓賦 |
유한준(兪漢雋) |
大東韻府群玉 (대동운부군옥) |
卷之六 |
取子車. 繅絲車 |
보물제878호 (선조22년, 1589) |
卷之九 |
木棉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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卷之二十 |
人名(鄭天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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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東雜錄 |
卷之五 |
文益漸 |
예천권씨종가문적 |
妙法蓮花經 (묘법연화경) |
卷之七 |
跋文 |
보물1081호 |
息山集(식산집) |
卷之十六 |
雜著 / 記江城君事 |
이만부(李萬敷) |
낙하생집(洛下生集) |
冊六 |
嶺南樂府 |
이학규 |
성재선생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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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전 |
연경재전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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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해응 |
淸臺先生文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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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포선생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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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박 |
천익(天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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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충공의 생몰시기를 기록한 문서 및 보책도 있으나, 근거가 미약한 바, 생몰 시기는 정확한 기록물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미상으로 두고 향후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임. [편집자 주]
2) 조선시대에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던 일. / 당상관으로서 치사하는 경우에는 중앙의 예조나 해당 고을에서 매달 술과 고기를 보내었고, 벼슬이 1품에 이르고 나이가 70세 이상이 된 자로서 국가의 필요에 의해서 퇴관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3) (文益漸, 1331년~1397년)은 고려 말의 학자·문신으로, 초명은 익첨(益瞻),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사은(思隱)/삼우당(三憂堂), 시호는 충선(忠宣),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도천서원에 배향되어있다.
4) 목면의 전래시기에 대하여서는 태조실록에는 무진년(1364년) 봄으로, 삼우당 실기에서는 정미년(1367년)으로 차이가 있다. 여기에서는 태조실록을 기초하여 무진년으로 본다.
5) 18세기 후반부터 약100년 동안 유럽에서 일어난 생산 기술과 그에 따른 사회 조직의 큰 변화. 영국에서 일어난 방적 기계의 개량이 발단이 되어 1760~1840년에 유럽 여러 나라에서 계속 일어났다. 수공업적 작업장이 기계 설비에 의한 큰 공장으로 전환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자본주의 경제가 확립되었다.
6) 世事淋漓不欲見 松竹任淸閑 (세사임리불욕견 송죽임청한)
7) 山雲愛溪鷗護幽趣 誰知林壑養淸閑 (산애계구호유취 수지임학양청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