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열공(경덕사)
은열공 관정 선생
世代 |
휘(諱) |
號(호) |
生 |
卒 |
관 직 |
득관파조 (6世) |
신열(臣烈) |
관정(官亭) 은열(殷烈)_시호 |
미상 |
미상 |
∙ 금자광록대부(품계) ∙ 병부상서(관직) ∙ 진양부원군(봉작) |
殷烈公 官亭 臣烈 선조님은 진양정씨 은열공파의 得貫 派祖이시다. 선생은 어려서 부터 천품이 뛰어났고, 어버이 섬김에 어김없어 효로 이름이 높았으며 자라선 예리한 뜻으로 독실하게 공부하여, 그 시대에 고려풍속이 불교를 숭상하였는데 선생이 독력으로 배척하고 반대로 성리학을 연구하여 유교의 종사가 되었다.
고려 8대 顯宗(1010년~1031년)조에 遺逸1) 조(유일)로 천거되어 벼슬에 올랐으며, 출장입상(出將入相)하여 문무를 겸한 재주가 있어, 병부상서(정3품)를 제수 받아 거란 난을 크게 물리친 공로로 금자광록대부(종2품)의 품계를 받으신 분이다.
先生은 불교를 배척하고 儒道를 행할 것을 여러 번 顯宗(현종)께 아뢰었으나 顯宗이 끝내 듣지 아니하였다. 先生은 이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니 조정에서는 先生이 大勳(대훈)의 공로가 있는데도 갑자기 辭退(사퇴)함으로 정자를 지어 내렸다. 당시 사람들이 그 亭子(정자)를 官亭(관정)이라 이르고 세상에서 官亭先生(관정선생)이라 일컬은 것도 이 때문이다. 선생은 스스로 호를 官亭이라 하고 우국충정을 나타내셨다.
훗날 漁灌圃2) (어관포)公 시에 「정자나무가 하늘을 가리 웠는데, 두셋 집이 그 아래에 있네3) 라는 것이 선생이 사는 곳 이었다. 생이 돌아가시자 조정에서 晉陽府院君 殷烈이라 諡號(시호)를 내렸다.
진양지 총묘조에 「선생의 묘는 고을 북쪽 성태동 용산에 있다」고 되어있다. [진양지 제4권 임관, 총묘 / “鄭臣烈墓在省台洞龍山”]
공의 선영 아래 있는 용산재에서 매년 음력 10월 9일에 시제를 모신다.
기록 및 유적
구 분 |
제 목 |
찬∙서(撰∙書) |
소 재 지 |
行 錄 |
殷烈公官亭先生實記 |
後 孫 象 圭 |
淸溪誌, 文獻錄 |
碑 |
殷烈公 官亭先生 廟庭碑文 |
이헌주 근찬 김상조 번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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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烈公官亭先生 神道碑 |
都事 李鍾杞 |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 용산재길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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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烈公官亭先生 遺蹟碑 |
道州 金在華 |
산청군 단성면 관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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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碣銘 |
殷烈公官亭先生 墓碣銘 |
曉庵 李中轍 |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 선영 |
기 타 |
용산재기 |
면우 곽종석 |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 용산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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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야에 묻혀있는 선비로서 학식과 인품을 갖추고 있으면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경우 이들을 과거시험 없이 발탁하는 인재등용 방법이다.
2) 1470(성종 1)∼1550(명종 5). 자는 子舜(자순), 호는 子游(자유)·灌圃堂(관포당)·渾沌山人(혼돈산인). 아버지는 文孫(문손)이다. 1492년(성종 23) 진사가 되고 1495년(연산군 1) 식년문과와 병과에 한꺼번에 급제하여 曲江郡守(곡강군수) 등 외관직을 거쳐 1510년(중종 5)에 장령, 1518년 헌납, 1521년 교리, 1529년에는 대사간이 되었다. 1542년 行副司果(행부사과)로서 書肆(서사)의 설립과 初試(초시)의 각 도별 실시를 상소했고, 1549년(명종 4)에 嘉善大夫(가선대부)에 올랐으며, 상호군을 사직한 뒤 벼슬을 하지 않고 경상남도 진주에 물러나 살면서 학문과 후학지도에 혼혈의 힘을 쏟았다. 1550년(명종 5) 81세의 나이까지 장수하였지만 죽기 전까지도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한다. 文名(문명)이 있고, 특히 농담을 잘하였다. 저서로는 《東洲集(동주집)》이라는 《灌圃詩集(관포시집)》이 있다. 고성의 葛川書院(갈천서원)에 제향되었다.
3) 蔽天亭樹兩三家 / 소남역(召南驛)을 표현한 魚灌圃詩 負岳臨江好風土奈何郵吏兩三家餘沙泉石曾遊地一去今驚歲月多에서 유래한 듯 -진양지 제2권 驛院-